몇 해 전이다. 나의 내담자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해서 늘 화가 나있었다.
자기가 공부를 하려고 하면 "불 꺼!!, 불 꺼!!" 하면서 소리를 불을 끄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어머니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고 아버지는 한량이었다. 그런 가운데 남동생은 공부를 하도록 지원했다고 한다.
삐뚤빼뚤한 이빨 때문에 웃는 모습이 자신이 없어 교정을 하고 싶었으나 비용 부담이 커서 너무 고민을 하니
어머니가 돈이 없는 상황에서 야매로 해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교정 비용은 비싸지만 1980년대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당시에 치과의사가 아닌 사람이 교정을 했다고 한다.)
교정이 잘못되어 그 후유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질문이 끝나자마자 불끄라며 소리지르는 아버지에 대해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말이 그치지 않았다.
나는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했다.
커다란 볼링 공과 같은 무거운 공을 그리고 네 귀퉁이에 공을 매달고 있는 용수철을 그렸다.
용수철을 그리면서 '이렇게 두꺼워야 이걸 들어서 아버지 가슴팍에 팍 던질 수가 있어요'라고 이야기 하였다.
무엇을 그렸는지 물어보았다.
나를 쳐다보며 자기 그림 설명을 한다.
아버지가 공부를 못하게 했고 돈을 못벌었고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며....
그러더니 남편 얘기, 딸 얘기, '우울하면 사람들과 관계도 잘 못하게 되고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안그럴려고 노력한다고 등등등.'
점점 산으로 간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 왜 볼링공 같은 크고 묵직한 공을 그렸을까?
그 공 무게는 얼마나 되냐고 물어보았다.
또 나를 쳐다보면서 '뭐 아주 크고 무거운 공' 이라고 하면서 또 속사포를 쏘아댄다.
그리고 끝 말에는 '됐나요?'라고 나에게 질문 아닌 질문을 한다.
뭐가 됐냐는 거지?
지금 자기가 자기 마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나에게 동의를 구한다.
대답을 잘했는지 나의 답을 구하는 건지.
내가 한 질문에 답을 잘 했냐는 건지...
하여간 그녀는 그림은 안보고 나만 보고 이야기 한다.
내담자가 속사포를 쏘아댈 때가 있다.
나는 열심히 들으면서 어느정도 지나서는 속사포와 속사포 사이를 잡아서 그 틈으로 들어가려고 타이밍을 언제나 노리고 있다.
속사포와 속사포 사이의 틈을 만드는 것이 첫 번째 미술치료의 목적이다.
어렵게 얻어낸 타이밍으로 들어간 후 나는 다시 당신이 그린 그림을 보라고 한다.
잠깐 흘끗 보고는 또 속사포를 날린다.
사람들은 같은 얘기를 늘 반복한다.
계속 같은 얘기를 몇 년, 몇 십년 동안 아니 평생 반복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풀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그녀에게 이 이야기는 여기(미술치료실)서 처음이신가요? 라고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자기를 아는 사람한테 다 이야기를 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미술 치료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건가...
사람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을 못듣는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녀 역시 자기가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림 좀 바라보라는 내 말도 못듣고 나를 쳐다보며 속사포를 쏘아대는데 자기 말을 어떻게 들을까?
그래서 그림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꺼냈는지 좀 보라고 말이다.
또 말을 하려고 해서 못하게 했다.
입을 막은 건 아니고 그림을 바라보도록 하였다.
이번에는 그림 보는 시간이 좀 길어졌다.
그녀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또르르 떨어진다. 나도 속으로 운다.
이번에는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만들어 보자고 했다.
종이를 구기고 찢고 노끈과 철사로 감고 압정을 꽂는다.
그런 것들을 몇 개 만들어 상자에 막 집어 넣더니 찢어놓은 검은 종이로 덮는다. 다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열심히 만들더니 왜 안보이게 넣어버리지?'생각했다.
"방금 만들었던 것들이 뭐예요?" 물어보니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나쁜 것들이란다. 나는 하나씩 꺼내 보라고 했다.
총 네개의 구기고 철사로 감은 종이 뭉치가 있었다.
우울함, 억울함, 남존여비사상(아버지가 남동생만 공부를 시키고 자신은 여자라고 공부를 못하게 한 것 때문에 생긴 생각), 분노 이렇게 네 가지였다.
그녀는 하나씩 마음 속에 있던 것들을 꺼내서 눈으로 보았다. 알고보니 각각의 것들에는 이름이 있었다.
하나하나 살펴보기까지 했다.
그녀는 마음을 꺼내고 말을 꺼내고 기억을 꺼냈다.
꺼내보았으니 이제 되었다.
꺼내 볼 수 있는 용기와 눈이 생겼으니까, 게다가 손으로 만지기(미술작업)까지 했으니 말이다.